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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窓

공분이 실종된 언론

열매파파 2009. 2. 4. 14:17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36710.html
[한겨레] 2009-02-04
공분이 실종된 언론

이제 더는 보지 않으리라고 기대했던 것들이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군사독재 종식과 권위주의 체제 해체와 함께 우리 사회가 영원히 벗어났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눈앞의 현실이 된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탄압논란과 언론인들의 파면·해직도 시간이 거꾸로 가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20여 년 전만 해도 언론인이나 작가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무릎을 꿇리고 구타당하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파면 해직은 말할 것도 없고 우스꽝스런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을 살기도 했다. 그 시절이 그리울 리가 없지만,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 시절의 언론에는 적어도 공분의 공감대가 있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수난을 겪는 동료들에 대해 연대의식이 있었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는 점에서는 소속사의 정체성은 별 의미가 없었다.

한승헌 변호사가 본지에 연재하고 있는 ‘산민의 사랑방 증언’에는 박정희 정권 때의 시국사건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시인 김지하는 개발독재 시대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풍자한 시 ‘오적’을 월간 <사상계>에 발표했다가 발행인 부완혁 등과 함께 법정에 섰다. 남한 사회의 빈부격차를 왜곡해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진부한 반공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변호인단의 의뢰를 받아 그 정도의 표현은 작가의 당연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취지의 감정서를 낸 인사 가운데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선우휘가 있었다. 그는 저명한 작가이자 편집국장·주필·논설고문으로 수십 년 조선일보에 몸담은 ‘골수 조선일보 맨’이기도 했다. 오늘의 언론 대치 상황만 보는 독자들에게 그의 행보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판(거리 판매용)에 바람잡이 사설을 실었다가 시내판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설로 바꿔치기 하는 방식으로 권력기관의 보도통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강단을 보였다. 한편으로 그를 독재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언론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일본의 월간지 <세계>가 70, 80년대 한국의 정세를 집요하게 규탄했던 ‘한국에서의 통신’을 연재했을 때 필자가 지명관씨라는 것을 알고서도 덮어두었다는 증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선우휘가 86년 세상을 떠났을 때 조사를 잡지에 쓸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일본인 작가가 있다. ‘국민 작가’ ‘국민 스승’이라고까지 불리는 시바 료타로다. 그는 메이지 시대의 부국강병 과정을 긍정적으로 묘사해 패전으로 주눅 든 일본인의 정신적 자신감을 되찾아주었다. 그는 우익의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보수적 지식인으로서의 양식을 발휘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80년 김대중 전대통령이 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세력에 의해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시바는 이토 외상에게 구명운동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이 커지자 “교과서를 거짓으로 쓰는 나라는 망한다”고 따끔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나의 게으름 탓인지, 아니면 눈에 뭐가 씌워졌는지 현재의 보수언론에는 최소한 공분이랄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언론사에서 해고사태가 벌어져도 피해자들을 훈계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다. 수년 전 한 보수신문에서 칼럼을 정기적으로 쓰던 한 언론인은 끔찍한 수모를 겪었다. 원고를 넘기고 마지막 대장에서 확인까지 했는데 신문이 인쇄된 뒤에 보니 자신의 글이 그냥 증발돼 버렸다고 한다. 결국 그는 수십 년 재직했던 신문사를 떠났다. 이미 ‘자율적 정화’가 진행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김효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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